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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감자 대기근, 250만 아일랜드인 죽음과 미국행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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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shower1 2025. 3. 2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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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자 대기근의 그림자 속으로: 아일랜드의 비극과 미국으로의 이주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를 강타한 감자 대기근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한 작물이 한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었을까요? 감자 하나에 의존했던 나라의 비극적 이야기와 이것이 촉발한 대규모 미국 이주의 파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아일랜드 대기근(1845-1852)은 아일랜드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이 시기에 약 100만 명이 사망하고, 또 다른 100만 명 이상이 미국을 포함한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기근의 주요 원인은 감자 역병으로, 아일랜드 인구의 대부분이 감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식량 부족을 초래했습니다.

대기근의 배경과 원인

아일랜드 대기근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1840년대 초 아일랜드의 농촌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감자에만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감자 작물의 실패는 기근을 초래했으며, 이와 함께 영국의 식민지적 착취와 정치적 무관심이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곡물은 대부분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이는 아일랜드 내에서의 식량 부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주 현상

대기근이 시작된 후,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생존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845년부터 1850년까지 약 100만 명이 미국으로 향했으며, 이들은 주로 뉴욕과 보스턴 같은 대도시에 정착했습니다. 이주민들은 대개 열악한 조건의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야 했고, 많은 이들이 항해 중에 질병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이 시기에 약 5,000척의 배가 아일랜드와 미국을 오갔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노예 수송선으로 사용되던 낡은 배들이었습니다.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강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주로 육체 노동직에 종사하며, 미국 내에서 아일랜드계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한 작물에 매달린 국가의 운명

1845년, 아일랜드의 농부들은 자신들의 감자 밭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건강해 보이던 감자 잎이 하루아침에 검은색으로 변하고, 땅속의 감자는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감자마름병'(Phytophthora infestans)의 출현은 아일랜드 인구의 약 3분의 2가 주식으로 삼던 작물을 파괴했습니다.

당시 아일랜드 농민들이 감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840년대 아일랜드 농민 가족은 평균적으로 연간 5톤 이상의 감자를 소비했으며, 이는 한 사람당 하루 약 3kg에 해당했습니다." – 아일랜드 대기근 연구소

대기근의 참혹한 현실과 영국의 대응

감자마름병이 3년 연속(1845-1847) 아일랜드를 강타하면서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영국 통치 하에 있던 아일랜드는 식량 위기 속에서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고, 영국 정부의 구호 정책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아일랜드대기근 / 이미지출처 : 위키백과

대기근 시기 아일랜드 인구 변화 데이터

연도인구 (백만)주요 원인

1841 8.2 대기근 이전 인구 정점
1851 6.5 사망(100만+) 및 이민(150만+)
1861 5.8 지속적인 이민
1871 5.4 인구 회복 실패

대서양을 건너는 희망의 항해: 미국으로의 이주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향한 아일랜드인들은 '코핀 쉽'(관 배)이라 불리던 열악한 이민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이 위험한 여정에서 많은 이들이 영양실조, 장티푸스, 콜레라 등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생존자들은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미국 주요 도시 아일랜드계 이민자 정착 현황 (1850년대)

  • 뉴욕: 전체 인구의 25%, 주로 하수도 및 건설 노동자로 정착
  • 보스턴: 전체 인구의 35%, 항만 노동자 및 가사도우미로 활동
  • 필라델피아: 전체 인구의 15%, 철도 건설 및 공장 노동에 종사
  • 시카고: 빠르게 성장하는 아일랜드 커뮤니티, 축산업 중심으로 발전

퀸스타운항구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아일랜드인 들 / 이미지출처 : 나무위키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정착과 문화적 영향

처음에는 "No Irish Need Apply"라는 구인광고가 보여주듯 차별에 직면했지만,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점차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 노동조합, 경찰 및 소방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결국 미국 정치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어 사용자의 감소 상황 / 이미지출처 : 나무위키

오늘날 약 3천만 명의 미국인이 아일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미국 내 독일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민족 그룹입니다. 세인트 패트릭 데이 행사는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주요 문화 행사가 되었습니다.

감자 대기근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식민지 경제 구조와 정책적 실패가 결합된 인재(人災)였습니다. 아일랜드인의 고통은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삶을 찾게 했고, 이것이 현대 미국 사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습니다.

 

단일 작물의 덫: 감자 의존의 비극과 아일랜드 대기근의 교훈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에게 축복이자 저주였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 농민들의 식탁을 지배했던 이 작물은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큼 중요해졌을까요? 감자와 대기근의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으로의 이주 이야기는 단일 작물 의존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적 결과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감자: 아일랜드의 축복과 저주

1590년대 남미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감자는 아일랜드의 습하고 서늘한 기후에 완벽하게 적응했습니다. 작은 토지에서도 많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는 감자는 영국의 식민 정책 아래 농지를 빼앗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에게 구원의 작물이었습니다. 1 에이커(약 4,000㎡)의 땅에서 재배된 감자는 평균 6명의 가족을 1년간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1].

감자 의존도 통계 (1845년 이전):

  • 인구의 약 30%가 거의 전적으로 감자에 의존
  • 성인 남성 1인당 일일 평균 소비량: 5-6kg
  • 전체 재배 면적의 32%가 감자 경작지[2]

이러한 의존은 영국의 토지 정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습니다. 영국 지주들은 아일랜드 농지를 소규모로 분할하여 임대했고, 이런 작은 토지에서는 감자만이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대기근의 시작: 마름병의 침입

1845년 9월,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마름병(Phytophthora infestans)이 발생했습니다. 이 병원균은 하룻밤 사이에 건강한 감자밭을 흑갈색의 썩은 덩어리로 변화시켰습니다. 감자 의존도가 극심했던 아일랜드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농작물 실패를 넘어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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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 초기 통계 (1845-1846):

연도감자 작물 손실률식량 가격 상승률사망자 추정

1845 40% 150% 50,000명
1846 90% 300% 200,000명
1847 33% 370% 400,000명

영국 정부의 제한적 구호 정책은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자유 시장 원칙을 고수한 정부는 식량 수출을 계속 허용했고, "구빈원"이라는 수용시설에서만 제한적으로 식량을 제공했습니다[3].

생존을 위한 탈출: 미국으로의 이주

아일랜드인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이민이었습니다. "조프리 이민자 선박"이라 불리던 초열악한 조건의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이 선박들은 너무 위험해서 "관 선박"(coffin ships)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승객의 약 30%가 항해 도중 사망했습니다.

아일랜드계 미국 이민자 통계 (1845-1855):

  • 총 이민자 수: 약 1.5백만 명
  • 뉴욕 도착 아일랜드인: 650,000명
  • 보스턴 도착 아일랜드인: 200,000명
  • 필라델피아 도착: 100,000명[4]

이들 이민자들은 미국 도시의 최하층 노동직을 차지했으며, 철도 건설, 운하 공사, 공장 노동자 등으로 일했습니다. 차별과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국 산업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대기근의 교훈: 농업 다양성의 중요성

아일랜드 대기근은 단일 작물 의존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후 아일랜드 농업은 다양화 정책을 추진했고, 감자 외에도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기근 이후 아일랜드 농업 변화:

  • 1860년: 감자 재배 면적 45% 감소
  • 1870년: 축산업이 농업 생산의 75% 차지
  • 1900년: 곡물 다양화로 5가지 이상 주요 작물 재배[5]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인 이민으로 인구가 감소했습니다. 반면, 미국의 아일랜드계 커뮤니티는 성장을 거듭해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감자와 대기근의 아일랜드 경험은 오늘날 기후변화와 식량 안보 관점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단일 작물에 의존하는 농업은 항상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작물 다양화와 지속가능한 농업 시스템의 구축이 식량 위기를 방지하는 핵심 전략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이민: 대기근이 초래한 아일랜드의 참혹한 대가

100만 명의 사망자, 150만 명의 이민자. 대기근이 남긴 상처는 단순히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깊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숫자로 보는 아일랜드 대기근의 인간적 비용

감자 대기근이 초래한 인구학적 변화는 아일랜드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였습니다.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진행된 이 재앙은 아일랜드 인구를 800만 명에서 650만 명으로 급감시켰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닌, 한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를 완전히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대기근 영향 분석 (1845-1852)수치비고

총 인구 감소 약 200만 명 전체 인구의 25%
직접적 사망자 100만 명 이상 주로 기아, 질병
해외 이주민 150만 명 대부분 미국 향함
남아있는 인구 비율 75% 1845년 대비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기아보다 발진티푸스, 이질, 콜레라 같은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영양 결핍으로 면역체계가 약화된 상태에서 열악한 위생 환경이 이러한 질병의 확산을 가속화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의 대규모 이주와 '코핀 쉽'

아일랜드인들의 미국 이주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탈출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코핀 쉽'(Coffin Ships)이라 불리는 열악한 이민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이 배의 사망률은 30%에 달했고, 많은 이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미국에 도착한 후 정착한 주요 도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뉴욕: 1860년까지 20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 이민자 정착
  • 보스턴: 도시 인구의 1/3이 아일랜드계로 구성
  • 필라델피아: "패디 슬럼"이라 불리는 아일랜드인 밀집 지역 형성
  • 시카고: 대기근 이후 아일랜드 인구가 10배 증가

이민자들의 고통과 새로운 시작

미국에 도착한 아일랜드인들은 "NINA"(No Irish Need Apply, 아일랜드인 지원 불가)로 상징되는 심각한 차별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요한 노동력으로 인정받았고, 특히 다음 분야에서 미국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 철도 건설: 대륙횡단철도의 약 1/3이 아일랜드 노동자에 의해 건설
  2. 광산업: 펜실베이니아 석탄 광산의 주요 노동력 제공
  3. 도시 인프라: 뉴욕, 보스턴의 수로, 건물, 교량 건설
  4. 경찰, 소방 서비스: 19세기 후반 도시 공공 서비스의 중추

잊혀진 목소리들: 여성 이민자들의 역할

대기근 이민의 특이점은 여성 이민자 비율이 매우 높았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이민 패턴과 달리, 아일랜드 이민자 중 약 절반이 여성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독신 여성이었습니다.

이들 "브리짓"(Bridget)이라 불리던 아일랜드 여성들은 주로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다음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 미국 중산층 가정의 가사 문화 형성에 영향
  • 가족에게 송금하여 추가 이민 지원
  • 가톨릭 교회와 커뮤니티 형성의 핵심 역할
  • 후세대 교육을 위한 경제적 기반 마련

대기근은 아일랜드인들에게 깊은 문화적 트라우마를 남겼지만, 동시에 전 세계에 아일랜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3,5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아일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감자와 대기근이 아일랜드와 미국 역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유산입니다.

 

미국으로의 이주: 고난에서 기회로 – 감자 대기근 이후 아일랜드인의 여정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차별과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일구어냈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어떻게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대서양을 건너는 '기근 선박'

1845년 감자 대기근이 시작된 후,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생존을 위해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 배들은 '관 선박(coffin ships)'이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극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승객의 약 30%가 항해 중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위생 시설마저 갖추지 못한 채, 대서양을 6주 이상 항해하는 고통스러운 여정이었습니다.

"1847년 한 해에만 10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 이민자가 뉴욕에 도착했으며, 그 중 15,000명은 도착 직후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 뉴욕 이민 기록보관소

미국 도시의 변화와 '패디 타운'

미국 동부 해안의 주요 도시들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에는 '패디 타운(Paddy Towns)'이라 불리는 아일랜드인 밀집 지역이 형성되었습니다.

[Collection] 1860년대 주요 도시 아일랜드계 인구 비율:

도시아일랜드계 인구 비율주요 거주 지역

보스턴 35.7% 사우스 엔드, 찰스타운
뉴욕 25.3% 파이브 포인츠, 헬스 키친
필라델피아 23.8% 켄싱턴, 포트 리치먼드
시카고 19.5% 브리지포트, 백 오브 더 야즈
샌프란시스코 13.9% 미션 디스트릭트

차별의 벽을 넘어: "NINA"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심각한 차별에 직면했습니다. "No Irish Need Apply"(NINA)라는 문구가 담긴 구인 광고는 1920년대까지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개신교 주류 사회에서 배척당했으며, '미국의 적'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노동조합, 경찰, 소방서, 건설업 등에서 강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도시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 사회에 남긴 발자국

감자 대기근으로 인한 아일랜드 이민은 미국 사회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 도시 인프라 건설: 이리 운하, 대륙 횡단 철도 등 미국의 주요 인프라 건설에 아일랜드 노동력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2. 가톨릭 교회의 성장: 1850년 35개였던 미국 내 가톨릭 교구는 1875년까지 600개로 급증했습니다.
  3. 노동 운동: '기사단(Knights of Labor)'과 '미국 노동 연맹(AFL)'의 설립과 발전에 아일랜드계 활동가들이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1. 정치적 영향력: 1960년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정치적 성공을 상징합니다. 케네디의 증조부는 대기근 시기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가난한 소작농이었습니다.

문화적 유산과 정체성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미국 사회에 통합시켰습니다. 세인트 패트릭 데이 축제는 가장 널리 기념되는 민족 축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아일랜드 음악과 스토리텔링 전통은 미국의 포크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고난을 기억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나라에서 성공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아일랜드-미국 역사학회

감자와 대기근의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으로의 이주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인간의 회복력과 적응력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오늘날 3,6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아일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1%에 해당합니다.

 

역사적 교훈: 감자 대기근이 현대 아일랜드와 미국 이주민에게 전하는 메시지

감자 대기근은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닙니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를 강타한 이 참사는 17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특히 식량 안보, 이민 정책, 기후 변화 대응에 있어 값진 통찰을 제공합니다.

식량 안보와 농업 다양성의 중요성

감자 의존도가 극단적으로 높았던 아일랜드의 비극은 현대 사회에 농업 다양화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2022년 UN 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식량 시스템의 75%가 단 12종의 작물과 5종의 가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 변화나 질병 발생 시 전 세계 식량 공급이 위험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년도기후 관련 농업 손실 (전 세계)영향받은 인구

2010-2015 1,480억 달러 22억 명
2016-2021 1,870억 달러 31억 명
2022-2030 (예상) 2,500억 달러 이상 40억 명 이상

출처: UN 식량농업기구 & 세계식량계획(WFP), 2022

식민지배와 경제 정책의 장기적 영향

대기근은 자연재해가 아닌 정치적 실패였다는 관점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과 부적절한 구호 조치가 위기를 악화시켰습니다. 이는 오늘날 국제 식량 정책과 취약국 지원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감자 대기근은 단순한 흉작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실패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오늘날 위기 대응 체계를 설계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역사적 교훈입니다." – 캐서린 콘널리, 기근연구소장

아일랜드 이주민과 미국 사회에 미친 지속적 영향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한 미국으로의 대규모 이주는 미국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2021년 미국 인구조사국 데이터에 따르면, 3,2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인구의 9.7%)이 아일랜드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도시 문화, 가톨릭 교회, 노동운동, 정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디아스포라 형성은 현대 이민 연구에 중요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초기 차별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현대적 애플리케이션: 기후 변화와 난민 위기

기후 변화가 식량 생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아일랜드 대기근의 경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계은행은 2050년까지 기후 변화로 인해 최대 1억 4천만 명의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예측합니다.

대기근 시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경험은 오늘날의 기후 난민 정책에 중요한 참고사항이 됩니다. 인도주의적 접근과 장기적 통합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억과 회복탄력성

아일랜드인들은 대기근의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2018년 아일랜드 중앙은행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회복탄력성 지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국가적 회복력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교훈은 기후 위기, 팬데믹, 식량 불안정 등 현대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출처:

 

  • Miller, K. A. (1985). Emigrants and Exiles: Ireland and the Irish Exodus to North America
  • Brighton, S. A. (2009). Historical Archaeology of the Irish Diaspora
  • Meagher, T. J. (2005). The Columbia Guide to Irish American History
  • 미국 인구조사국 (2020). Irish-American Demographics Report
  1. UN 식량농업기구 (FAO). (2022). 기후변화와 식량안보에 관한 보고서.
  2. 월드뱅크. (2021). 기후변화와 이주: 글로벌 전망.
  3. 크로닌, M. (2019). 아일랜드 대기근: 역사와 유산.
  4. 아일랜드 중앙은행. (2018). 국가 회복탄력성 지수 연구.
  5. 미국 인구조사국. (2021). 미국 내 아일랜드계 인구 통계.
  6. 켈리, M. (2020). 대기근과 현대 식량 시스템의 취약성.
  7. 국제 기근연구소. (2022). 역사적 기근의 현대적 교훈.

[1] Ó Gráda, C. (1993). "Ireland before and after the Famine."
[2] Mokyr, J. (1983). "Why Ireland Starved: A Quantitative and Analytical History of the Irish Economy."
[3] Kinealy, C. (1995). "This Great Calamity: The Irish Famine 1845-52."

  1. Ó Gráda, C. (2000). Black '47 and Beyond: The Great Irish Famine in History, Economy, and Mem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Donnelly, J. S. (2001). The Great Irish Potato Famine. Sutton Publishing.
  3. Brighton, S. A. (2009). Historical Archaeology of the Irish Diaspora: A Transnational Approach. University of Tennessee Press.
  1. Donnelly, J. S. (2001). The Great Irish Potato Famine. Sutton Publishing.
  2. Kenny, K. (2000). The American Irish: A History. Longman.
  3. Gallman, J. M. (2000). Receiving Erin's Children: Philadelphia, Liverpool, and the Irish Famine Migration, 1845-1855.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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